MZ세대의 새로운 요리법, 이수진의 음식남녀

이건수

이수진은 철저하게 솔직한 작가다. 시대와 무엇보다 자신에게. 이미 힘을 빼고 담담한 색채로 다가오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필묵에 대하는 그의 진실한 자세와 태도가 오롯이 느껴진다. 과포화된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자신의 사소한 일상과 단상을 일기 쓰듯, 메모 하듯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옛 선비의 소소한 문인화가 발랄한 MZ세대적 버전으로 재탄생한 느낌이다. 우리시대의 동양화가들 중 어느 누가 이처럼 욕심 없는 그림을 그렸었던가.

영화 <취화선>에서 오원(吾園)이 붉은 빛을 표현함에 몰두하다 김칫국물로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있다. 세상의 어느 안료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붉은 빛을 김칫국물로써 스며들게 할 때 작가의 마음 속 빛깔과 생동하는 기운의 생명력은 가장 진실한 모습으로 화면 위에 얼룩 진다. 그래서 가장 욕심 없고 정직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런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내러티브가 이수진의 작업 속에 있다.

이수진의 초기작은 롤러코스터 철로의 곡선을 강한 필치와 빠른 속도의 묵선으로 거침없이 표현한 연작이었다. 2015년 부터 최근 중국 산동의 체험 이후 현재까지 다양한 ‘음식산수’와 우리시대의 ‘음식 기명절지’를 통해 현대인, 더 자세히 말하면 작가 동세대의 욕망과 허무를 기록해왔다. 언뜻 보아 현대인의 욕망과 일상을 음식의 이미지로 표현한 중국화가 리진(李津)이 떠오르지만 리진이 진하고 알차다면 이수진은 싱겁고 슴슴한 방식으로 화면을 요리한다.

음식은 원래 자연의 선물이었다. 선사인들은 그 음식이 되는 동식물의 영혼들을 존중했고 감사의 마음으로 음식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사냥이라고 할 수 없는 사냥으로 생존을 이어갔다. “곰아 네가 나의 창으로 다가와서 찔려주지 않겠니? 숲 속의 왕인 네가 죽고 나면 동굴성당에서 너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도록 기도해줄게.” 동물의 얼굴을 훼손시키는 것은 그 영혼과 자존심을 모욕하는 금기사항이었다. 만물에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뭉툭한 돌이 아닌 날카로운 칼을 쓰기 시작한 철기시대부터 문명이 아닌 진정한 야만은 시작되었다.

이후 증여 자체였던 음식이 교환의 품목으로 변하였다. 동물과 식물은 사육과 재배의 대상이 되었고 상품화되었다. 더 이상 음식은 자연의 선물이 아니라 매매의 목적, 자본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자본과 노동과 투자의 산물이 된 음식은 자동차와 다를 바 없는 공산품, 자본주의의 현실을 대표하는 상징적 상품이 된 것이다.

이수진은 대중소비사회 속에서의 부조리한 음식의 가치, 극성화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과 음식이 관계 맺는 기묘한 메커니즘, 그로 인해 드러나는 현대인의 사적인 욕망 구조에 집중하면서 배달이라고 하는 현대판 사냥술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몸의 운동 보다는 돈의 이동으로 이루어진, 직접적인 채취가 아닌 간접적인 네트워킹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수렵 방식이다. 더 이상 스스로 요리하지 않고, 보이지 않은 금전의 지불을 통해 자신의 현재적 식욕에 가장 근접한 음식을 배달 받을 수 있는 편리한 도시인의 욕망은 그러나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남는다.

이수진은 가끔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시고 먹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맛을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라는 《중용》의 한 구절을 그림 속에 써놓는다. ‘주변을 스치는 그 수많은 도(道)의 이치를 스스로 살피지 못하여 제대로 모른다.’는 의미를 음식에 빗대어 설파한다. 수많은 음식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또 거꾸로 말해 그 수많은 음식 중에서 과연 우리에게 진실을 주는 음식은 몇이나 될까. 아무리 먹어도 배는 부르지 않고, 진실한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욕망은 채울수록 또 다른 욕망이 되어 저만치 도망친다. 욕망할수록 결핍을 느끼고, 사랑할수록 외로워진다. 이수진은 음식을 통해 허기진 현대인의 욕망과 사랑을 은유하고 있다.

배달음식은 배달음식일 뿐이다. 패스트푸드와 정크푸드는 그것의 장점이 곧 단점이 되어버린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달음식이나 편의점음식이 소울푸드가 되어버린 세대, 음식의 포르노로 전락한 ‘먹방’을 오히려 위안과 대리만족으로 삼는 세대의 쓸쓸한 풍속도가 이수진의 화면 속엔 담겨 있다.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깡통은 대중소비문화의 위세와 자본주의라는 물질주의가 최고조에 달할 때만 나올 수 있는 작품이다. 그가 처음 캠벨수프를 소개할 때 마치 슈퍼마켓의 진열대처럼 갤러리 벽면에 선반을 설치하고 그 위에 동일한 이미지와 사이즈의 캔버스들을 줄지어 나열한 방식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했다. 게다가 공장식 대량생산의 실크스크린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거대한 대중적 소비구조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시선을 드러내주었던 사실은 굉장히 진지한 시대통찰력 또한 보여준다. 우리나라 같으면 우리에게 익숙한 황도깡통이나 꽁치통조림의 속된 이미지를 진지하고 심오한 캔버스 위에 어떻게 불경스럽게 담을 수 있느냐는 비판에 맞선 작가의 용기가 드러나는 장면이라 하겠다.

이런 용기는 이수진에게도 필수적이다. <just do eat>, <사랑한다 면> 등 제목에서 이미 광고문구나 대중가요의 팝적인 요소들을 패러디하면서 시대적 동류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전통적인 장르를 토대로 시대의 정신을 기록하겠다는 의지, 고유하고 단순한 재료에서 주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언어와 표현 방식을 통해 신성하고 엄숙한 화선지의 공간을 참신함과 경쾌함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려는 이수진의 노력은 의미 있고 주목할 만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